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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폐지론 -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한 미봉책

요새 갑자기 정계에서 힘을 받고 있는 외고폐지론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대강 아래와 같은 논리에 입각한 얘기인 것 같다.

  • 기본전제: 외고는 외국어 집중 교육을 통한 외국어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특수목적의 고등학교이다.
  • 주장:
    1. 그러므로, 외국어를 좋아하고 잘하는 학생이라면 다른 과목 성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갈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모든 과목을 잘하고 영어듣기까지 잘하는 최상급 학생의 학생만이 갈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준비하기 위한 사교육이 판을 친다.
    2. 또한 외고 학교 당국은 외국어집중 교육을 해야하는데 그보다는 국/영/수/사회/과학 입시 교육에 집중함으로써 학생들이 입시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하는데에 여념이 없다.
    3. 마지막으로, 외고 학생들이 진정으로 외국어 인재가 되고 싶어한다면 마땅히 대학진학시 어문계열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런 최상급 학생들의 마음은 딴데 있어서 어문계열을 선택하는 학생은 30%를 넘지 않으며 법대, 경영대, 심지어 의대, 이과계열을 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외국어 인재 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 결론: 그러므로, 외고를 폐지하면 사교육을 잡을 수 있다. 외고를 자사고(내신 50% 이내에만 들면 지원 가능하며 지원자 내에서 추천으로 선발)로 만들거나 아예 폐지하자.

입시 위주의 획일적 교육, 사교육으로 인한 계급 고착화 등등에 깊은 반감과 우려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신자유주의적인 논리로 현 한국 입시 교육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위와 같은 외고폐지론의 주장과 결론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사교육을 줄이고 공교육에 기반하여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미봉책이다. 

일단 외고폐지론의 주장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 외고는 외국어만 좋아하고 잘하면 갈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외국어(특히 영어)를 잘하는 것이 권력이 된 우리 사회에서, 외국어 교육에 대한 수요는 학업성적 수준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있다. 문제는, 모든 고등학교가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최상의 외국어 교육 환경을 제공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외고 입장에서는 공급에 대한 수요 초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반적인 학업성적과 영어듣기 실력이 뛰어난 학생을 위주로 선발해 왔다. 이 선발방식 자체는 외국어에 뛰어난 인재 양성이라는 외고의 설립 목적을 볼 때에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학생들이 사교육 없이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외고선발기준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열악한 우리나라 중학교 공교육 수준이다.

2. 외고는 입시위주의 교육만 한다? 실제로 외고의 커리큘럼을 보면 50% 이상이 어문계열의 수업이며 (영어, 제 2외국어 및 제 3외국어), 이 어문계열의 수업이 일반고와 달리 세분화되어서 진행된다 (예, 독어종합, 독어회화, 독어독해, 독일문화 등). 뿐만 아니라 일부 외고에서는 방학 중 해외어학연수나 해외친구들과의 교류 프로그램등까지도 진행하는 등 일반고교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것으로 안다. 물론, 나머지 반은 다른 일반고교와 마찬가지로 국어, 수학, 과학, 사회 등이며, 이를 제외한 예체능과 교련 등의 과목은 상대적으로 거의 무시당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것은 한국에서는 상업계, 공업계, 예체능계 고교를 제외한 어느 일반고등학교나 마찬가지인 현실이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고등학교 전반적으로 전인교육을 중시하고 대학들이 전인적 기준으로 학생선발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가능한 일이지 외고만 두들긴다고 될 일이 아니다.

3. 외국어 인재가 되려면 대학교 어문계열에 진학해야 한다? 외국어에 뛰어난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은 뛰어난 외국어실력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인재를 기른다는 의미가 되어야지, 외국어에 올인할 사람을 키운다는 협의의 개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외국어를 잘하는 인재들이 경영, 법학, 공학, 의학, 자연과학 등 각종 분야에 포진해서 유학도 가고 국제적으로 논문도 발표하고 외국계 회사에도 들어가고 해야 진정으로 그 외국어를 제대로 활용하여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 아닌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외국어 인재를 외국어만 잘해서 그 언어 통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인력으로 정의한다면, 외고의 수를 대폭 줄이고 (1-2개면 충분하다. 통번역 인력에 대한 수요란 한계가 있으므로.) 졸업생은 의무적으로 외국어대학교와 통역대학원으로 보내는 것이 맞다. 대학교 어문계열은 해당언어로 된 문학과 언어학 이론을 학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으로서 실용 외국어 실력을 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렇게 외고를 대폭 줄이고 통번역 기술인력양성소로 만들 경우, 통번역 기술인력이 아니더라도 일반 인력에 대한 외국어 실력 요구가 큰 우리나라 현실에서, 고등학교에서의 수준 높은 외국어/국제적 교육에 대한 엄청난 수요 문제가 다시 남게 된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외국어 교육 환경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자사고로 가라고? 그렇게 되면 그런 몇몇 자사고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 경쟁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 자사고에 못간 학생들은 다시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나? 결국, 이것은 외국어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큰 데 비해 거기에 맞게 외국어 교육 환경을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공교육의 문제이지, 외고 존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잘못된 주장들에 근거해 나온 '외고를 폐지하면 사교육을 잡을 수 있다'는 결론에 대해, 정말 안이한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사교육을 이런 식으로 없애고 싶으면, 외고가 아니라 서울대 연고대가 자사고 방식(내신 50% 이내에 들면 지원가능하고 추첨으로 학생 선발)으로 학생을 선발하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학생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학진학이지 외고 진학이 아니다 (외국대학교 진학을 위해 외고 유학반에 진학하는 일부의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그런데 왜 서울대가 이런 식으로 학생 선발을 하지 않는지, 왜 그렇게 하면 안되는지 생각해 보기 보란다. 더 극단적으로 모든 대학을 전부 추첨 선발을 통해 평준화해버리면 사교육이 싹 사라질텐데, 왜 그렇게 안하는지, 그렇게 하면 과연 우리나라 대학교에 우수학생들이 남아 있을지 생각해보기 보란다. 

대학이 우수한 학생을 모아놓고 교류와 경쟁을시키는 것처럼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육은 모든 학생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것은 모든 수준의 학생들에게 다 해당되는 얘기이다. 즉, 실력이 조금 모자라는 학생들이 자기 눈높이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상급 수준의 학생들은 최상급 수준의 학생들끼리의 경쟁과 상호 교류를 통해 더 실력향상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수준에서 이런 최상급 학생들의 니즈를 채워줄 수 있는 수월성 교육 기관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운대로 학업성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과학고와 외고라는 특목고가 그 자리를 대신해 왔다. 외고가 특목고라는 전제 하에, 외고를 철저히 특수목적 기술인력양성으로 돌리거나 폐지해버리거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월성 교육 기관에 대한 국가적 니즈와 학생들 개인의 니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Phillips Exeter와 같은 최고 사립고들과 공립고교들의 차이가 하늘 땅 차이인 미국 같은 나라는 물론이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도 명문 초중고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외고가 없어져도 수월성 교육기관에 대한 니즈는 존재할 것이며, 제 2의 외고가 생겨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정말 핵심 문제는 학교별로 수준차이가 나고 최상급학생들이 더 나은 학교에 진학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도 다음 단계에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중국과 같은 경우, 명문 초중고교와 명문대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사교육이 우리나라처럼 판을 치지 않는다. 사회주의 시스템 때문에 공립학교들의 교사 인력이 학교 밖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월성 교육 기관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많은 사람들 말고 보통 사람들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런 수월성 교육 기관에 들어갈 '실력'을 기를 '기회'를 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학교 교육을 사교육에 비해 경쟁력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얘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외고폐지와 같은 쉬워보이는 미봉책에 현혹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 시장은 잡지도 못한채 애꿎은 외고만 죽이기는 결과가 나오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쓸데없는 변화를 겪느라 그리고 제 2외 외고를 찾아 다니느라 고생만 하게 될 것이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외고가 지금까지 축적한 교육 시스템과 노하우 (institutional knowledge)에 대한 평가 및 향후 보존 대책은 외고 존폐 문제와는 별개로 중요하게 고민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외고를 없애고 그 자리를 다른 수월성 교육 기관이 대체하게 되어도 그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모든 학교를 완전 평준화하고 (외국 교육 체제와의 경쟁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수월성 교육 기관은 필요하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대원외고를 위시해서 몇몇 외고들은 나름대로의 국제적 감각 교육 및 수월성 교육 노하우를 쌓아왔고 우리나라의 이른바 명문대들에 대거로 학생들을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미국 아이비리그 같은 데에까지 많은 학생들을 진학시키며 외국의 유명 명문고교들과 비교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고 인정을 받아왔다. 또한 이른바 국제적인 분야에서 활약하는 인력(외교,국제금융 등)이나 외국 유학생들 중에 외고 출신이 월등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갑자기 준비없이 외고를 폐지하면 여러해에 걸쳐서 쌓아온 이러한 교육 노하우가 허망하게 한순간에 사라지게 될 위험이 높은데 이런 것은 정말 하루아침에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외고 제도 자체를 어떻게 하기로 결론이 나든지 간에, 외고들이 국제적 감각 교육 및 수월성 교육 분야에서 쌓아온 시스템적인 노하우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대책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그냥 생각도 없이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 다시 말하지만, 수월성 교육에 대한 니즈는 매우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외고와 같은 일개 제도를 없애는 것과 수월성 교육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공교육이 제대로 이 니즈를 못 받쳐준다는 것이 핵심 문제인데, 이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 수박겉핥기로 문제를 푼답시고 이미 이룬 긍정적인 성과까지 없애버리는 어리석음은 제발 없기를 바란다.

덧붙임. 이 글은 현 외고 교육에 대한 옹호가 아니며, 사실 나는 일부 외고들 (그리고 일부 비평준화 고교들)의 공부 기계형 교육이라든지, 두발 규제, 소지품 검사 등 갖가지 종류의 학생 인권 침해, 그리고 일률적인 밤 늦게까지의 자율학습 같은 비효율적이고 강압적인 학습 환경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입시 성공이 유일한 목표이다시피 한 한국 전반적인 교육 철학과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다른 일반계 고교에서도 종종 일어나며, 무엇보다 외고 존폐의 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이 글에서는 단지, 이런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외고를 옹호할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고폐지=사교육 문제 해결'이라는 주장이 하도 근거없고 비현실적이라 외고폐지론을 비판할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by 난아 | 2009/10/18 03:50 | - World issues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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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염장 Blog, STW.. at 2009/10/24 15:07

제목 : 외고 폐지론 -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긴다..
외고폐지론 -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한 미봉책 외고 폐지론에 대해 의견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이미 정리를 잘 해두신 분들이 계시더군요. 그 중의 한 글에 트랙백을 겁니다.......more

Commented by ㅇㅇ at 2009/10/19 23:50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마지막 부분에 학생 인권 침해와 강압적인 학습 환경은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의 문제이지 외고의 문제는 아니죠. 외고는 오히려 두발규제, 소지품 검사 같은 면에선 오히려 자율적입니다.
Commented by ㅇㅇ at 2009/10/20 00:11
근본적인 문제는, 학생들이 사교육 없이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외고선발기준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열악한 우리나라 중학교 공교육 수준이다. <-- 아니죠. 어자피 선발기준인데 모든 중학교가 하바드대 수준으로 가르쳐도 거기서 또 대학원 수준들고나오는넘 생기고 그러면 선발기준은 다시 올라가죠. 외고가 어학위주인이상 한국에서는 어떤 수준으로 중학교 교육을 해도 차이가 날수밖에 없습니다.
Commented by 난아 at 2009/10/20 01:16
ㅇㅇ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지적하신 바에 답변이 길어질 것 같아 곧 다른 글로 올리겠으니 그 때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덧붙임의 내용은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그런 심한 경우가 제가 본 일부 외고에 한정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세월이 흘러서 요즘은 외고가 이런 면에선 오히려 일반고보다 나아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을 위해선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ㅇㅇ at 2009/10/20 10:19
외교폐지가 사교육 해결? 사교육 완화죠.
해결과 완화는 아주 다릅니다.
어떤 문제든지 100%해결은 없습니다. 잘해야 99%완화.
따라서 해결못하니 좋은 정책이 아니다라는건 좋은 반론이 못되죠.
Commented by arondight at 2009/10/28 20:2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입시문제나 교육기회에 있어 빈부격차의 문제를 거론하며 외고를 공격대상을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지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부분을 정확하게 거론해주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secret at 2009/11/09 18:50
제가 외고생인데, 이 문제에 관해 스스로도 가치정립이 안되어서 혼란스러웠어요. 이 글이 여태까지 읽은 글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좋은 글 너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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